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잉그리드 버그만 (문단 편집) == 생애 및 활동 == [[스웨덴어]]로는 잉리드 배리만[*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베리만.]으로 발음된다. 하지만 미국에선 무명 시절부터 영어식인 잉그리드 버그먼으로 발음했다. [[스톡홀름]]에서 [[스웨덴인]] 아버지와 결혼 전 성이 아들러(Adler)인 [[독일인]]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. 애들러(Adler)라는 성씨를 쓰는 영미권 사람들 중에 10에 9는 독일계 [[아슈케나짐]] [[유대인]]들이다 보니 버그먼이 독일계 유대인 혼혈이 아닌가 하는 얘기가 있었고, 버그먼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었으나 그냥 스웨덴-독일 혼혈이다. 딸 [[이사벨라 로셀리니|이자벨라 로셀리니]]가 Finding Your Roots에 출연해 DNA 테스트를 했는데 유대인 혈통이 나오지 않았다. 유대인은 모계로 판단하니 확실히 아니라는 얘기.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, 13살 때는 아버지를 여의어 숙부의 집에서 자랐다. 17세 때 스웨덴 최고의 명문인 왕립 드라마 스쿨(Dramatens elevskola)에 입학했으나, 자퇴하고 영화계에 투신해 스웨덴과 독일 영화계에서 활동했다. 유럽 영화계에서 활동하던 버그먼의 배우 생활은 1936년에 출연한 <[[간주곡|인터메조]]>로 새 길이 열리게 된다.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O. 셀즈닉이 버그먼을 눈여겨보아 [[미국]]으로 초청한 것. 이에 응한 버그먼은 미국으로 건너와 1939년 [[레슬리 하워드]]와 함께 <인터메조>의 [[리메이크|개작]]을 찍으며 할리우드에 데뷔한다. 그러나 외국에서 건너온 무명 여배우를 써주는 영화사는 없었고, 버그먼은 <[[지킬 박사와 하이드/창작물#s-4|지킬 박사와 하이드씨]]> 외엔 변변한 출연작이 없는 상태였다. 한편 이 영화를 찍을 때 상대역이었던 유부남 [[스펜서 트레이시]]와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. 그러던 중 1942년 셀즈닉이 [[워너 브라더스]]에 버그먼을 대여해주면서 출연하게 된 <[[카사블랑카]]>로 세계적으로 일약 스타가 되고 이후 찍은 영화들 역시 호평을 받으며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들 중 한명이 되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24.media.tumblr.com/tumblr_m7mypbhxZ81rc4lyco1_500.jpg|width=100%]]}}}|| || {{{#ffffff '''<카사블랑카>'''}}} || 당시 버그먼의 인기는 '''만인의 연인''' 수준으로 1943년 [[어니스트 헤밍웨이]]의 소설 "[[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]]"를 영화화할 때에는 헤밍웨이가 직접 주인공 마리아 역으로 버그먼을 지명했다. 헤밍웨이는 아예 원작 소설의 여주인공을 버그먼에 기초하여 구상했다고도 밝혔다. 한편 이 영화를 찍으면서 버그먼은 상대역인 [[게리 쿠퍼]]에게 반해 사랑에 빠졌다. 이 시기 [[앨프리드 히치콕]]과 여러 영화를 찍었으며, 1944년 [[가스라이팅]]의 어원이 된 <[[가스라이팅#s-3|가스등]]>에 [[샤를 부아예]]의 상대역으로 출연해 [[아카데미 여우주연상]]을 받았다. 버그먼은 히치콕이 "어떻게 영화 안에서 존재해야 하는지, 어떻게 해야 빛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었다"고 했다. 1945년 히치콕은 <[[오명(영화)|오명]]>을 찍으면서 "버그먼조차도 몰랐던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내줬다." 히치콕은 버그먼을 수제자격으로 뒀을 뿐만 아니라 버그먼의 자녀들에게도 잘 대해줬다고 한다. 또한 이 영화는 뿐만 아니라 "오만하고 뻣뻣할 거라고만 생각했지만"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평생의 친구 [[케리 그랜트]]를 만나게 해준 기회이기도 했다. 그랜트는 현장에서 버그먼에게 "그 어떤 배우보다도 친절하게 대해줬다." 1957년에 두 번째 [[아카데미 여우주연상]]을 타고도 아이들과 유럽에 체류하고 있어 가지 못할 때 대리 수상해준 것도 그랜트였다. <[[나의 길을 가련다|성 메리 성당의 종]]>(1945)의 수녀 역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버그먼은 <[[잔 다르크/기타 창작물#s-5|잔 다르크]]>(1948)로 대중의 신망을 굳히게 된다. 버그먼은 무대에서도 [[잔 다르크]] 역을 했다. 그러나 버그먼은 [[이탈리아]] 영화감독 [[로베르토 로셀리니]]와의 열애로 배우 경력 최고의 위기에 맞닥뜨리게 된다. 버그먼은 로셀리니의 <독일 영년(Germania anno zero)>(1948)을 보고 감동을 받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. >"로셀리니 씨, 당신의 영화 <[[무방비도시]]>(Roma città aperta, 1945)와 <전화의 저편>(Paisan, 1946)을 봤습니다.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. 만약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하다면, 그녀는 [[영어]]는 아주 잘하고, [[독일어]]는 조금 할 줄 알고, [[프랑스어]]로는 의사 전달이 가능하고, [[이탈리아어]]는 오직 '사랑해'만 알고 있는 배우인데요, 저는 당신과 함께 일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." > 버그먼은 정말로 로셀리니의 곁으로 달려가 그의 영화에 출연하며 사랑에 빠져 임신을 했다. 문제는 로셀리니가 [[유부남]]이었고 버그먼 역시 남편과 딸이 있는 [[유부녀]]였다는 것. 이 [[불륜]] 사건은 1940년대 후반 미국에 파란을 일으켰다. 당시 할리우드는 지금보다 불륜이 더 성행해서,[* 비단 할리우드 뿐만이 아니라 사교계를 중심으로 상류층 전체에 이혼과 불륜이 매우 흔했다. 현재도 상류층 대다수의 결혼생활이 모범적이진 않으나 과거엔 빈도수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태가 부도덕했다.] [[미국영화연구소#s-5.5|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]] 목록에 오른 50명 중 [[셜리 템플]], [[제임스 캐그니]], [[프레드 어스테어]] 이렇게 단 세 명만 제외하곤 전부 불륜을 저질렀다. 임신을 한 게 문제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, 불륜 상대를 임신 시켜 사생아를 뒀거나 낙태를 종용했던 유명 남자 배우들, 몰래 낙태를 감행했던 여자 배우들 역시 한둘이 아니다. 그리고 당대 연예 기자들은 언제나 이를 다 알고 있었다. 결국 불륜이 포장돼 유야무야 넘어가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그저 언론에서 작정을 하고 끌어내리느냐 마느냐에 달려있었는데, 버그먼의 경우엔 외국인이었다는 점과 칼럼니스트 헤더 하퍼에게 거짓말을 한 게 결정적으로 작용했다. 하퍼는 기본 독자수가 3500만 명에 달하는, 그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연예계 칼럼니스트였다. "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제작자들이 벌벌 떤다"는 본인의 자랑이 전혀 허황되지 않을 정도였다. 하퍼는 1940년대에 버그먼의 경력을 강력하게 지원하는 기사들을 썼고, <[[나의 길을 가련다|성 메리 성당의 종]]>(1945)이나 <[[잔 다르크/기타 창작물#s-5|잔 다르크]]>(1948)는 하퍼가 따다준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했다.[* 경력이 크게 흔들리던 시절의 [[조운 크로퍼드]]에게도 강렬한 지지를 보내 업계에서 쫓겨나기 일보 직전이었던 크로퍼드를 [[아카데미 여우주연상]] 수상자로 바꿔놓았다. 하퍼는 고전 할리우드 시대를 다룬 드라마 [[퓨드]]의 중심인물 중 하나다.] 그래서 임신 추정 기사들이 나올 때 버그먼이 이를 부인하자 하퍼는 그 말만 믿고 열렬하게 임신을 부인하는 기사를 썼는데, 하필 당시 하퍼와 앙숙지간이었던 루엘러 파슨스[* Louella Parsons. 파슨스와 하퍼의 원한 관계는 매우 유명해서 이를 자세히 다룬 (1985)라는 TV 영화까지 있다. [[CBS(미국)|CBS]] 방영 당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다. [[엘리자베스 테일러]]가 파슨스 역이었고, [[팀 로빈스]]가 [[조셉 코튼]] 역으로 나왔다.]가 동시에 로스 엔젤레스 이그재미너(Los Angeles Examiner) 1면에 버그먼의 임신 확정 특종을 터뜨렸다. 파슨스에게 이걸 제보한 사람은 다름 아닌 [[하워드 휴즈]]였다. 버그먼이 찍기로 약속했던 영화를 취소하자 분풀이를 한 것이었다. 이는 매우 치졸한 처사였는데, 휴즈 본인이야말로 혼외 관계에서 여러 어린 여성들을 임신 시키고 반강제로 낙태하게 만든 뒤 돈과 권력으로 무마했던 걸 상기하면 더더욱 그렇다. 특종을 읽고 충격을 받은 하퍼는 유부녀인 버그먼이 유부남의 사생아를 가졌다고 비난하는 데 제일 앞장서게 됐고, 그로 인해 거센 비난 여론이 일었다. 성녀 [[잔 다르크]], [[수녀]] 같은 역할들을 도맡아와 청순하고 고결한 이미지가 너무 강했던 것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. [[앨프리드 히치콕]]도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다. 버그먼은 히치콕을 높이 평가했고 히치콕 역시 버그먼을 자신의 작품들에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특별하게 대우해 주고 있었다. 그런데 갑자기 다른 감독을 찾아 떠나버렸으니. 이후 페르소나 자리가 [[그레이스 켈리]]에게 넘어갔지만 보통 버그먼 정도의 효과를 낳았다고 여겨지진 않는다. 버그먼은 결국 [[할리우드]]에서 추방당하게 된다. 휴즈처럼 당시 재계, 정치권, 그리고 할리우드 권력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불륜을 저지르고 다니며 사생아를 양산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활동했던 것에 비추어보자면, 지나치게 불공정한 엄벌이었다. 버그먼은 1949년부터 [[이탈리아]]에서 로셀리니와 함께 영화를 찍었지만 연달아 흥행에 실패했다. 게다가 로셀리니는 버그먼이 자신 이외의 감독과 작업하는 것을 매우 반대해서 둘 사이의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. 다만 이때 찍은 <스트롬볼리>나 <이탈리아 여행> 같은 영화들은 소위 [[모더니즘]] 영화의 시초라 불리며 [[재평가]]받게 된다. 1956년 버그먼은 로셀리니가 인도에 촬영을 하러 간 사이에 <[[아나스타샤#s-4]]>에 출연하며 6년만에 할리우드 복귀를 하였다. 여론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감독 아나톨 리트박이 버그먼이 아니면 작업을 안하겠다고 선언을 하여 촬영할 수 있었다. 당시 최고의 TV쇼였던 "에드 설러번 쇼"에서 에드 설러번[* Ed Sullivan. 독실한 [[가톨릭]] 신자로, 평생 아내 한 사람에게만 충실했다.]은 버그먼을 초대할지 말지를 "시청자 여러분의 뜻에 맡기겠다"면서도 "이 정도면 충분히 속죄하지 않았냐"고 말하기도 했다. 버그먼은 <[[아나스타샤#s-4]]>로 두 번째 [[아카데미 여우주연상]]을 수상하며 미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복귀했지만, 이를 계기로 1957년 로셀리니와 이혼하였다. 한편 로셀리니는 이혼 직후인 1959년 <로베레 장군(Il generale Della Rovere)>으로 [[베니스 국제 영화제]]에서 최고상인 [[황금사자상]]을 수상하고 말년에는 영화와 TV 연출을 병행했다. 1958년 [[파리(프랑스)|파리]]에서 활동하던 스웨덴인 연극 연출가 라스 쉬미트와 세 번째 결혼을 하면서 로마에서 파리로 거쳐를 옮기고 프랑스에서 활동하였다. 이때부터 연극에 많이 출연하였으며 전세계 순회 공연을 하고 [[토니상]] 등을 수상하였다. 세 번째 남편과는 1975년 이혼하였고 이혼 후에는 [[런던]]으로 다시 거쳐를 옮겼다. 1972년 [[유방암]] 선고를 받았으나 연기에 매진, 1974년 출연한 <[[오리엔트 특급 살인#s-5.1]]>으로 [[아카데미 여우조연상]]을 수상했다. 1978년에는 마지막 영화 출연작인 [[잉마르 베리만]]의 <가을 소나타>에서 명연을 펼쳐 [[아카데미 여우조연상]] 후보에 올랐다. 노화의 증거를 보여주자는 베리만의 설득을 받아들인 버그먼은 이 영화에서 화장을 다 지우고 실제 삶에서의 자신을 드러냈다. 버그먼이 "내 기존 팬들이 다 나가떨어질 거"라고 경고하자 베리만은 "내가 (이 영화로) 새로운 팬을 얻어다줄테니 걱정 말라"고 했다. 정확히 67세 생일이던 [[1982년]] [[8월 29일]]에 사망했다. 그것도 친구들과 파티를 개최한 뒤에 말이다. 유작은 TV 영화 . [[골다 메이어]]를 그린 이 영화에서 버그먼이 맡은 배역은 당연히 [[골다 메이어]]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